동명목재상사 설립
해방 이전의 우리 목재공업은 대체로 원시적인 제재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소규모 수공업 형태였고 산간지대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이때에도 일부 원목이 해외로부터 수입되었는데, 1929년의 경우 남북한 총 목재 공급량(239만 6,000㎥)중 13%에 해당하는 목재가 미국, 일본, 필립핀 등지 로부터 수입되었다.
이러한 때에 중국과 미국 등으로 전쟁을 확대해 나가던 일본은 한국인의 민족자본에 의한 기업성장을 방관하지 않았다.
기업 정비 조치로 한국인들이 경영하는 굵직한 공장을 빼앗아 버렸다. 어렵게 설립한 강석진 회장의 동명목재제재소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 통에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 후 해방까지 모든 한국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도 어려운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일제의 강제 때문에 애써 창건해 키워왔던 공장을 눈물을 흘리며 문을 닫아야 했던 그는 다른 사업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목재산업으로 시종일관해야 한다는 신념으로국내에서 기계를 만들어 합판공장을 세웠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그도 어느덧 삶의 연륜이 깊어가는 장년층이 되었다. 해방후 좌우익이 엇갈려 혼란하던 무렵 그는 애착을 갖고 있던 제재소업에 다시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는 제재소에서 각목과 합판을 팔던 수익을 올릴 것으로 확신했으나 사회환경은 그렇지 못하였다. 백두산과 일본에서 수입했던 원목은 일본이 물러나자 수입할 수 도 없었다. 그러한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사업전선에 일대혁신책을 마련하고 공장을 부산 진구 범일동 862번지(광무교 옆)로 옮겼다. 목재산업으로 시종일관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국내에서 기계를 만들어 합판공장을 세웠다.
합판공장을 세우고자 했던 그의 동기는 매우 창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로선 절대적 수요를 갖고 있던 목재였지만 헐벗은 산천 어디에서도 이를 충족할 수 없었고 따라서 거의 외국수입에 의존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해 둔다면 목재의 효율을 최대한으로 올리는 일이 목재산업의 최대 관건이 아닐 수 없었다. 합판이 이를 만족시킬 수 있었음은 당연하다. 합판이란 수입된 나무를 가지고 허실을 줄이고 부가가치를 극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창의성에 힘입어 그의 상재(商材)는 갇혔던 봇물 터지듯 다시 발휘되어 역경을 누르고 사업을 단숨에 본 궤도에 올려 놓았다. 일제하에서도 용기와 집념으로 난관을 뚫었던 그였던 만큼 해방된 조국에선 물을 만난 고기처럼 누벼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1949년 동명제재소는 합판생산 라인을 갖추어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가공기술이 필요한 합판이 흔치 않아 나무판자 등 단순한 목재가 주요 건축재료였다. 합판은 종류가 수십가지나 되는 만큼 현대에 와서도 다양하게 사용되고 건축에 있어서 없어선 안될 주요자재이다. 단단하고 가벼우며 가공이 손쉽고 사용범위가 넓어 생산을 시작하자 인기가 폭발했다. 건축업계에 새로 등장한 국산합판은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던 것이다.
6.25전쟁이 끝나고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주택을 비롯한 각종 전후 복구사업 및 인구증가에 힘입어 제재업이 급속히 성장할 사회환경이 조성되어 가기 시작했다.
6.25이후 사회는 혼란을 거듭했으나 우리나라 건축업계에 새로 등장한 합판은 성수기를 맞은 셈이었다. 이후 범일동 공장은 계속 늘어나 종업원이 200여명에 달했다.
빚을 다 갚고 회사 규모가 커지자1949년 상호를 동명목재상사로 개칭
그러나 제재소를 경영하던 중 화재 발생으로 공장이 전소되었다. 그는 화재를 보면서도 당황하지 않고 뒷일을 생각하였다. 경찰서에 가서 화재 신고를 한 뒤 이럭저럭 화재를 정리하고 난 뒤 정확한 재산 피해액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 공장 기계는 훼손의 정도가 심하지 않아 다시 수리를 하고, 기계를 사들이는 등 2개월여 동안 공장을 재정비하였다.
빚을 내어 60여일 동안 목재를 사들이고 물건을 만들어 토목부(현 건설교통부)에 납품하였고, 신용 덕택에 주문이 많아 고생은 많았지만 60일 안에 목재를 구입한 빚을 다 갚았다.
이에 강석진 회장은 회사 규모가 커지자 1949년 상호를 동명목재상사로 개칭하였다.
그후 사세 확장을 위해 모든 정열을 쏟던 중 1959년 9월 추석을 맞이하여 뜻밖에 사라호 태풍을 맞았다. 영남 일대를 강타한 태풍으로 판자집은 유실되고 추수기에 접어든 농작물의 피해는 말할 수 없었다. 범람한 동천은 광무교를 덮쳤고 소, 돼지, 가축은 물론 가구등 회사 집기들의 급류에 떠내려 갔다. 불행중 다행으로 공장 피해는 모터 몇 개가 물이 들어간 정도였지만 신선대 저목장의 원목이 부산 내외항에 걸쳐 포항, 구룡포, 일본 대마도와 대한해협까지 흘러가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그 당시 사회일각은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대혼란을 겪고 있었지만 사업계에서는 오히려 이러한 혼란이 자극이 되어 주었다. 합판은 건축 경기를 타고 실내 장식용이나 간단한 외부시설용으로 사용되고 있어 새로운 수요가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10대의 더벅머리 소년이 혈혈단신으로 부산에와 온갖 괴로움과 시련을 겪으며 동명을 일으키기까지 이제 그는 성실과 의지로 일어선 재계의 본보기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강인한 의지력이 없었던들 대동명은 창조될 수 없었을 것이다.
1960년 가을, 남구 용당동에 부지를 확보하여 불도저로 야산을 개간하고 축대를 쌓아 공장 건설에 박차를 가하여 동양제일의 합판공장을 초현대식 규모로 설립하기 시작했다. 11월초 이곳에서 개최된 야유회에서 전종업원들은 해발 10m지상에 1만평이나되는 저목장이 완성되어 원목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웅대한 부지와 그 장관에 흐뭇함과 가슴 뿌듯함을 느꼈다. 이제 사라호 태풍에도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고 사원 모두가 반가워했고 군납과 내수 합판의 양산으로 회사는 날로 발전해 갔다.



있는 강석진 회장

1969년 제 2공장이 가동되었고 화사는 계속 성장을 이룩하여 68년, 69년, 70년, 71년 연속 4년동안 전국 수출 1위의 수출 최고상을 획득했다.
제 2공장이 정상화되고 보니 보유하고 있는 10M높이의 만평 독크는 활동가치가 적어 외항(外港)에 거대한 축항(築港) 도크공사의 필요성을 느꼈다. 또한 작업장의 규모도 확장해야 했기 때문에 10만평의 독크를 활용하면서 10년동안 매립하여 축항 도크공사를 완성하였다. 1972년 매립된 독크 위에 제3공장이 건설되기 시작하였고 펜타핵사민 공장 등 1974년까지 계속 시설을 확장했다.


68~71 수출최고상 기
50여년간 회사의 규모는 일취월장했다. 전 경영진과 근로자들은 제품생산에 전심전력하였고 하루가 멀다 하고 회사는 또 다른 차원으로 발전하였다. 동명의 기업철학이 적중한 셈이었고 전 사원이 합심노력한 결과였다.
세계최대의 합판 메이커로서 국내의 시장을 주름 잡아온 동명목재상사는 제 1, 2, 3공장을 가동함으로써 일간(1974.3) 170,000장의 일반합판을 생산하게 되었다. 길이로 환산하면 418.8Km에 달하는 것으로서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록(427Km)에 버금가는 엄청난 양이라 할 수 있다.
지칠 줄 모르는 전진만이 70년대 수출 100억불을 달성할 수 있는 지름길임을 알고, 그는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적인 작업에 혼신의 힘을 쏟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