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은행 설립
제2차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된 1967년부터 한국경제는 본격적인 근대화 공업구조로 이행된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제성장을 보족해 줄 중앙과 지방의 균형된 발전은 여전히 요원한 상태였다. 따라서 지역개발을 위해서는 수도권에 집중되고 있는 중앙관리기능을 부산, 광주, 대전 등에 분담시켜 이들 도시를 서울에 비견할 수 있는 경제활동의 중심이 될 수 있도록 금융, 정보, 기술 등 지원 서비스 기능을 분산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1967년 1월 17일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지역자본을 집대성하여 그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함은 물론 내자동원의 극대화를 위해서 지방은행의 설치를 검토 추진할 것이라는 정부의 방침을 밝혔다. 이와 같은 정부의 방침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첫해를 맞이한 우리나라의 경제사정으로 보다 내자동원체제의 저변확대와 균형있는 지역경제 발전이 무엇보다도 절실히 요구된 데 따른 것이었다. 사실상 경제개발계획의 계속적인 추진으로 공업화가 급속히 추진됨에 따라 이를 뒷받침해 줄 산업자금의 수요는 점차 확대되었으나 금융기관 저축을 통한 투자재원의 확보는 이에 미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은행 설립을 위한 최초의 움직임은 1967년 1월 23일 부산상공회의소 59회 임시총회와 114회 상임위원회에서 부산 지방은행(가칭) 설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동 위원회의 회칙이 통과됨으로써 비롯되었다.
부산상공회의소가 주축이 되어 부산 지방은행의 설립을 위한 작업이 추진되고 있는 것과 때를 같이 하여 중앙에서는 1월 28일 재무부와 한국은행의 실무자들이 연석회의를 가졌다. 이 회의에서는 지방은행의 설립 지도 및 지원문제를 지방 상공회의소 회장을 중심으로 단일 발기인단을 구성하여 설립문제를 담당하도록 하되, 출자에 있어서는 지방은행이 특정인을 위한 은행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발기인단의 전액 출자를 피하고 일반 공모와 발기인단의 일부 출자로 발전시키도록 하였다.

1967년 1월 31일, 당행 설립의 실질적인 태동이라 할 수 있는 발기인 공모를 하였다. 발기인은 60명 이상으로 하였다. 발기인 수를 60명으로 한 것은 특정인이 독점함으로써 파생될 부작용을 막는 데 그 뜻이 있었으며, 그야말로 부산 시민의 은행으로 만들려는 의도라 할 수 있다. 발기인을 공모한 결과 본래의 좋은 의도와는 달리 신청 접수한 발기인은 32명만이 왔을 뿐 실질적 출자가 될 것을 기대하였던 부산의 유력한 기업인들은 발기인 참여를 꺼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유력 기업인들이 예상과 달리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를 기피한 이유는 우선 새로 설립될 은행의 전망을 확실히 파악하지 못한 점과 시중 금리와 주식투자를 비교해 볼 때 수지채산이 불투명하다고 판단한 점, 주식의 분산으로 균등 출자할 경우 은행에 대한 강력한 발언권을 해사할 수 없다는 점 등 때문이다. 이후 발기인 구성을 32명으로 출발하면서 사무국에서는 발기인 후보자에 대하여 별도로 참여를 위한 권유 활동을 전개했지만 결국 32명만이 신청해 왔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당초 예상했던 인원에 훨씬 못미치는 적은 수의 발기인이었으나 설립추진 일정에 맞추어 발기인 총회를 소집하지 않을 수 없어 3월 3일 첫발기인 총회에 이어 9월 6일까지 6개월 동안 무려 12차례 발기인회를 개최하였고, 그 과정은 무척 힘들었다. 1967년 10월 10일 법인 15명, 개인 19명 총 34명의 발기인단을 최종 확정하여 발기인단을 구성하고 일인당 최소한 5백만원 이상의 주식을 인수하였다. 1967년 7월 20일의 제10차 발기인회까지 주식 인수 현황을 보면 발기인 인수가 88.000주, 일반 공모가 74,690주가 인수 확정되었다. 나머지 주인수 137,310주에 대한 인수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으나 신덕균, 구인회 3인이 인수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만약의 경우, 위3인의 인수 또한 어려울 경우, 새로 임명되는 부산상공회의소 회장단에서 나머지 주인수 주를 인수토록 방침을 세웠다.
1967년 10월 10일 창립총회가 오후 2시 본점(현 신창동지점) 3층 강당에서 개최 되었고, 총 238명의 주주 가운데 143명이 참석한 이날 총회에서 임시 의장에 강석진 발기인 대표를 선임했다. 임시의장으로 선임된 강석진 발기인 대표는 인사말을 통하여 "지역사회 발전에 공헌하게 될 부산은행의 창립을 주주의 한 사람으로 매우 기쁘게 생각하며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국가산업 발전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 고장의 번영을 위해서 부산의 상공인들은 합심하여 부산은행을 육성해 나갈 것"을 다짐했다.
총회부의 안건 중 임원 선임의 건은 우선 임원의 수를 7명으로 하되 인선은 발기인과 주주 중에서 지명된 전형위원들이 결정짓기로 하였으며, 그 결과 이사에 강석진, 이상덕, 장상준, 박장길, 장충식의 5인이, 감사에는 진근수, 이동설 양인이 선출되었고, 이사회를 개최하여 부산은행의 초대임원진을 구성하였다. 임원진 구성은 은행장 이상덕(전 한국은행 감사), 전무이사 장충식(전 한국은행 대구지점장), 상무이사 박장길(전 제일은행 업무추진 부장), 이사 강석진(동명목재상사 사장), 이사 장상준(동국제강주식회사 부사장), 상임감사 진근수(전 중소기업은행 부산 중부지점장), 감사 이동설(미성건설주식회사 사장)이 선임되었다.
1967년 10월 25일 대통령 연두교서가 발표된 지 약 9개월 동안 온갖 각고 끝에 최초의 지방은행인 부산은행이 부산에 탄생한 것이다. 개점식은 오전 8시 부산시 중구 신창동 1가 8번지 구 상공회의소 건물을 말끔히 단장한 본점 3픙 강당에서 이상덕 은행장을 비롯한 전 임원과 83명의 직원, 정부대표, 재부 각 기관장, 주주, 지역 상공인과 시민 등 4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김 총무부장의 개원 선언으로 감격스러운 막이 올랐다. 강석진 발기인 대표는 축사를 통해 부산 시민이 설립한 부산 시민의 은행인 부산은행 설립을 진심으로 축하하면서 앞으로 지방금융의 활성화를 기해 나가는 동시에 지방산업발전에 부산은행의 기여가 지대할 것이며 부산은행의 발전을 위해 부산 상공인을 비롯한 모든 부산 시민의 끊임없는 협조와 성원이 선행되어야 할 것임을 강조했다.
9시를 알리는 시보와 함께 영업을 개시하자 전직원을 대표하여 박태주 업무부장의 직원선서가 있었고, 금고 개장 테이프를 끊으면서 개점식을 이루었다. 이날 150만 부산 시민을 위한 부산은행의 문이 활짝 열렸으며 부산 금융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인 부산은행의 영업이 처음 시작되었다.
부산은행 예금통장 제1호에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20만원을 축하 예금 하면서 첫 고객으로 기록되었고, 제2호는 서봉균 재무부 장관이 10만원을, 제3호는 김세련 한국은행 총재가 10만원을 각각 예금하면서 예금 창구는 붐비기 시작했다. 부산상공회의소 의원, 발기인 및 직원들의 창업 의욕이 결실로 나타난 업무를 개시한 당일 총 예수금은 520만원이었다.
지역사회 개발과 사명감을 갖고 출범한 부산은행은 규모상으로 우리나라 제2의도시이고 제1의 항구 도시인 부산에서 순수 민간 자본금 3억원을 갖고서 지방은행으로 탄생한 것이다.
1967년은 우리 나라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세운 초년도이고 여기에 지방은행 역사가 때를 같이 하여 시작되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968년 3월 31일 창립 후 처음 맞이한 6개월 간의 제1기 영업성과는 총예수금 13억원, 총대출금 8억원 및 당기 순이익이 "천만원"으로 배당율 8.5%였으며, 4월 6일에는 은행 창립에 지대한 공적을 남긴 강석진 당시 상공회의소 회장 겸 단행 이사를 명예회장으로 추대하였다.
1969년 2월 7일 4시 35분께 연차 부산에 온 박정희 대통령은 부산은행(본점)을 시찰하여 그간의 강석진 회장을 위시한 관계 상공인과 임직원의 업적과 노고를 치하하면서 영업부에 들러서 약 10분간 창구를 두루 살피면서 직원에게 "정기예금은 하루에 얼마나 들어오느냐" "정기예금 중 몇 개월짜리가 제일 인기가 있느냐"는 질문을 일일이 하는 등 은행 업무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정기예금 20만원을 손수 예입하였다.
부산은행은 강석진 회장을 비롯하여 60여 상공의원은 물론 재부업계 인사들의 절대적인 협조의 결실이라 하겠다. 또한 이 부산은행의 개점은 기존 시중은행의 중앙집중적인 금융체제에 큰 자극을 주었으며 부산 시민은행으로서의 본점 혜택을 보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