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학공업에 참여
동명그룹은 모체인 동명목재상사를 비롯하여 동명산업 주식회사, 동명개발(주), 동명중공업(주), 동명해운(주), 동명식품(주) 등 6개 회사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중화학공업 분야 회사는 동명산업과 동명중공업 2개 회사이다.
무역입국을 지향하는 국가의 제3차 경제개발계획은 장기적은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해 노동집약적인 경공업 산업으로부터 기술집약분야인 중화학공업 육성으로 정책방향이 설정되었고, 이러한 배경에서 초창기 합판산업으로 수출 선두주자였던 동명목재상사는 중화학 공업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당시 화학분야는 이미 울산석유화학공단이 정상가동에 들어가 있었고 중공업분야는 창원기계공업기지가 태동전야에 있었을 때이므로 기계공업분야에 참여하기 위하여 계획수립에 착수했다.
동명산업주식회사는 50여년 성장발전해 온 동명목재상사 옆 30,000여평의 부지 위에 10,000여 평의 건물과 종업원 570여명으로 출발 80년대 수출과 때를 같이 하기 위해 동명목재상사에서 이미 가동 중이던 기존 포르마린 요소수지, 페인트 등 화학제품 부분을 하나의 법인체로 독립시켜 1974년 12월 3일 창립되었다.
동명산업은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일본 및 대만에 각종 수지제품을 수출하여 그 품질의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었으며 초산비닐에말죤을 쿠웨이트에 첫 수출하여 크게 호평을 받았다.



동명중공업의 첫 사업분야는전동지게차의 자체생산과 일본 YUKEN사의 유압기를 수입, 판매하는 것이었다
동명중공업 회사 창립은 제3차 경제개발계획의 일환인 정부 권장 산업으로 창원기계공단이 1974년 4월 17일 설립되었다. 1차 기지 조성공사가 74년 12월에 완공되자 타 기업들의 입주 러시가 이루어졌고, 당시 동명산업(주)도 75년 4월 입주가 확정되어 동년 11월 1일 동명산업(주) 창원공장을 공단내 일번가인 현 A-2블럭에 공사착공을 보게 되었다. 당시 토지구입 상황을 살펴보면 현 H중공업 부지 3만평과 현재 위치 15,000평의 부지선정에 고심하였으나 사업성을 감안, 위치가 중앙인 현재 위치 15,000평을 선정, 구입하게 되었다.
동명중공업 창원공장은 1975년 10월 11일 신축공사팀이 창원에 도착하여 건설에 이르기까지 1년 반 동안 비지땀을 흘려 77년 2월에 완공하였는데, 당시 시설은 주로 동명산업의 기계설비와 1차 IBRD차관 시설재(US $ 2,030千: 77년 2월 - 6월 통관 완료), 즉 통관진행상태에 있는 장비들이었다.

1차로 150여명의 인원이 창원공장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그 인원은 동명산업(주)의 기계사업부 근무인원이거나 부산, 경남일원에서 신규모집하여 보충되었으며, 사실상 당시만 하더라도 도시권의 생활근거지를 떠나 모든 일을 새로이 정리해야 할 창원공장으로 발령나는 것을 이들은 내심 꺼려하고 있었다. 이를 격려하기 위하여 "앞으로는 기계공업 전망이 밝을 뿐만 아니라 그룹에서도 최대중점 사업으로 지정했기 때문에 여러분은 선택되어진 것이다. 창원은 부산에서 볼 때 서부지역에 위치해 있으며, 미국의 서부개척자를 상기하고 그러한 정신으로 출발하자"고 그들을 설득했다.
동명중공업의 첫 사업분야는 전동지게차의 자체생산과 일본 YUKEN사의 유압기기를 수입, 판매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앞서 2종의 분야가 국내에서는 전혀 미개척분야였다는 것이고, 특히 유압기기는 기계공업의 성역화, 자동화의 필수근간이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수익성 측면보다도, 타사가 손을 대지않은 분야로서 기업의 사명감 측면에서 그 중요성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전동지게차 사업은 동명목재상사에서 수입, 사용하고 있던 FBR형을 샘플로 하여 완전분해, 순수한 자체기술로서 국산화에 착수하였던 것으로 실로 과감한 시도였다.
75년 1월 초, 기계사업부 앞뜰에서 드디어 첫제품의 시운전이 실시되었는데, 이날은 경공업 팀들이 기계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된 계기를 마련한 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