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의 공장 새마을 운동
우리나라 새마을운동은 1970년 농어촌에서부터 시작되어 새마을운동으로 확산되었고, 1974년에 들어와서는 공장 새마을운동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공장새마을 운동의 필요성은 인정되었으나 공장 새마을운동을 추진할 수 있는 방안과 방향이 제시되지 않아 현실적으로 어려운 때라 궤도에 오르기가 어려웠다. 국제적으로는 산유국들의 석유 무기화로 인한 유류파동이 전 세계의 산업계를 흔들어 국내경제는 불황의 수렁 속에서 헤어나지 못해 모든 기업체의 근간이 흔들이는 때였다. 여기에 동명도 예외는 아니어서 회사운영은 큰 타격을 받고 있었다. 창사 이래 최악의 적자폭을 겪으면서 침체일로의 와중에 직면하게 되었다. 7,000여명이나 되는 대가족이 이 불황과 침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절박감에 봉착했고, 이러한 사실의 중요함을 여실히 느낀 사람이 그 당시 공장장으로 있던 김오수(金五洙) 전무였다.
당시 김오수 전무는 공장 새마을운동의 효과적인 추진만이 동명이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고 불황을 이겨낼 수 있는 길이라 생각했다. 이에 따라 공장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과 또 공장 새마을운동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되는가 하는 등의 생각 끝에 우선 자신이 수원 새마을연수원에 입교하여 교육부터 받아야겠다고 결심을 굳혔다.

그 당시 새마을연수원 교육은 인생관을 바꾸어 놓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정신개조, 생활태도 변화에 역점을 둔 교육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기업주가 근로자를 자기 가족처럼 생각하여 근로자 복지를 위해서 노력해야 하고 근로자들은 회사를 자기 집 자기 일처럼 생각하여 상하 일치될 때 공장 새마을운동은 최대의 성과를 올릴 수 있음을 강조한 바 있다.
이러한 의식에 기초한 새마을 교육을 받은 공장장은 교육내용을 정리하여 새마을운동의 참뜻을 강석진 회장에게 전달하였다. 강 회장은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그 운동은 평소 내가 생각한 뜻이야. 하면서 흔쾌히 모든지원을 약속했고, 이러한 지원에 힘입어 공장 새마을운동은 전 동명가족에게 번져가기 시작했다.
먼저 불을 붙일 지도자를 가능한한 많이 새마을연수원에 입교시키는 한편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내 전달교육에 주력하였다. 사내 전달교육에서 새마을운동은 기업주나 몇몇 특정인을 위한 운동이 아니고, 우리 전체가 잘 살기 위한 운동임을 인식시키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는 동명의 공장 새마을운동은 먼저 기업주가 사원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구체적인 도입단계 실천방안이 제시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새마을운동 추진사업이 직원들의 가계에 다소 도움을 주고자 먼저 새마을 매점을 개설하였다. 모든 관리비를 회사가 부담하는 한편, 생활필수품의 일부나마 공장출고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게 했고, 새마을 식당을 운영하여 야간 근무자 전원에게 야식을 회사부담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그리고 1973년부터 실시하던 동명장학회를 동명 새마을장학회로 개칭하여 수혜대상을 확대하여 사원들의 교육부담을 덜어 주었다.
특히 그 당시 회사가 최악의 적자를 기록하면서도 공장 새마을운동을 전개한 지 1개월만에 30%임금인상을 단행하여 회사를 믿고 일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였던 점은 특기할 만하다. 그뿐만 아니라 사원들의 정신순화를 위하여 교양강좌 개설, 건전가요 보급, 취미활동 등에 각별한 관심도 기울였으며, 관리체제를 개편하여 전 직원들이 회사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기 위해 전 기술직원을 10명 단위로 하여 4백27개의 분임조를 구성하였고, 전 분임조원들의 정신력에 힘입어 생산성은 향상되었고 원가 절감이 이루어져 유류파동의 후유증을 그런대로 견디어 낼 수 있었다. 더욱이 기술직원들의 결근과 이직이 현저히 감소하는 등 스스로 참여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는 것이 운동의 값진 결과로 남게 되었다.


제2단계는 1975년도에 자조 발전단계를 설정하고 새마을운동의 생활화를 기본목표로 정했다. 이것은 생활 자체가 곧 새마을운동이 되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었고 동명인의 가족들도 새마을운동에 참여시켜 다같이 새마을 운동을 실천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자조 발전단계에 와서는 사원 복지정책에 더욱 힘을 쏟아 직원에게만 무료진료를 해오던 부속병원을 개방하여 사원들의 가족들에게도 무료진료를 하도록 하였다.
또한 종래의 장학금 수혜대상을 대학 재학생들에게까지 확대 실시하였다. 이에 따라 동명새마을장학금 12회 전달식에 해당 수혜자는 926명에 달하였고 장학금액은 학기등록금 전액을 지급하여 2,620여 만원이었다. 그 동안 장학금의 총액은 7,359명에게 1억4천5백여 만원이 지급되었다.
강석진 회장은 9회 장학금 전달식에서 "우리민족의 앞날을 짊어지고 나아갈 여러분들의 학업에 보탬이 될 수 있다면 고맙겠다"고 말하고, 안으로는 북한 공산당이 남침야욕을 버리지 않고 밖으로는 치열한 무역전쟁의 장벽이 우리의 앞날을 가로막고 있음을 강조한 후 장학생 여러분들은 열심히 공부하여 힘을 길러 우리 나라의 앞날에 대비해 줄 것을 당부했다.
12회 장학금은 장학생 노종현(동아대 1년)에게 전달되었고 김은혜(경남여고 3년)가 장학생 대표 답사를 하였다. 이날 식장에 나온 장정순씨(노무과 식당근무)의 아들 홍성문 군은 해양대(3년)에 재학중이었고, 이송관 사우(품질관리과)의 아들 이추동 군은 서울대(조선과)에 입학한 것이 밝혀져 동명장학회를 한층 빛내기도 하였다.
1975년 말에는 적금계약고 3억1천만원과 보통예금잔고 3천3백만원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올렸다. 이렇게 전 동명가족이 직장과 가정에서 맡은 직무에 충실할 수 있게 되자 합판생산성이 1인 70매 이상선으로 향상되었고 원자재 절약등으로 인한 원가 절감액이 7억2천800만원에 달하였다.
이상과 같은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통해 공장새마을운동이 점차 자리를 굳히자 동명은 정부로부터 자립단계 공장으로 선정되어 표본 새마을공장으로서 다른 업체의 교육장으로 활용되기에 이르렀다. 동명의 성공사례를 전국 각 새마을연수원에서 발표함으로써 타사의 공장 새마을운동 점화에 크게 도움을 주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1976년을 공장 새마을운동 자립확산단계로 정하고 공장 새마을운동의 기수가 될 것을 다짐하고 선구자적 역할을 다할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공장새마을운동의 결실은 다음과 같이 모든 직원에게 한 단계 위의 정신계발에 역점을 두었다.첫째, 모든 동명인은 새마음갖기운동과 둘째, 새생활운동, 셋째, 근로조건의 지속적 개선과 생산성 향상, 넷째, 분임토의의 전력화, 다섯째, 교육훈련의 강화에 초첨을 두었다.
첫째의 새마음갖기운동은 인간이 모든 사회활동의 주체가 되고 인간의 행위를 지배하고 명령하는 것은 정신이요, 마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옳고 밝아야 행위 또한 옳고 바를 것이기 때문이며, 이는 나무가 곧아야 그 그림자가 곧은 것과 같은 이치이다.
둘째, 새생활 운동은 일상생활에서 부딪치게 되는 모든 문제를 타성적으로 처리할 것이 아니라 가장 합리적이고 능률적이며 경제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먼저 찾고 생각하는 지혜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을 길러야 된다는 것이다. 강회장의 항상 낭비를 없애고 근검절약하는 생활태도, 사치와 허영을 버리고 필요한 곳에는 돈을 쓰되 아껴쓰는 생활습관과 저축하는 생활로 내일에 대비하는 슬기를 가져야 한다는 말은 더욱 전 사원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셋째, 근로조건의 지속적 개선과 생산성 향상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과하지 않은 사항이며 이를 위해 동명인은 많은 일들을 해냈으며 그 성과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생산성 향상과 품질 및 수출향상은 괄목할만한 것이었으며 이것으로 인하여 기업이윤이 증대되었고 손실은 최저선에서 막을 수 있었다. 따라서 호황, 불황을 가리지 않은 꾸준한 임금인상, 복지시설 확장 및 근로조건 개선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수출과 품질 및 생산성 향상은 기업이윤을 증대시켰고 기업이윤은 임금인상, 복지시설 확장 등의 방법으로 근로자에게 환원되며 일부의 이윤은 새로운 투자와 근로조건 개선에 투입되어 확대 재생산이 가능하다는 순환원리를 터득했다 할 수 있다.
넷째, 분임토의조의 전력화를 설명할 때, 공장 새마을운동을 나무에 비유한다면 분임토의조는 뿌리이고, 추진기구는 줄기이며, 성과는 꽃이나 열매라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분임토의조의 활발한 활동없는 공장은 새마을운동을 하고 있더라도 그것은 마치 줄기와 꽃만을 꺾어다 화병에 꽂아 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화병에 꽂힌 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결과가 어떨 것이란 것은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기 때문이다. 자발적이고 능률적인 분임조 활동으로 제안이라는 영양을, 공장 새마을운동 추진기구라는 줄기로 끊임없이 공급하고 그 줄기가 꽃과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다섯째, 교육훈련의 강화는 이러한 당사 공장 새마을운동의 기본적인 추진방향이 설정되었다하더라도 이것이 몇몇 사람만이 아는 일이거나, 일시적으로 알려졌다가 잊혀지거나, 그 참뜻이 잘못 이해되어서는 올바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이런 뜻에서 정부 당국의 새로운 공장 새마을운동 지도방향을 알고 다른 공장의 성공사례를 우리의 것과 비교 검토하는 기회를 가져 새로운 추진기법을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지도자반의 새마을연수원 위탁교육을 강화하고 이를 사내에 홍보하기 위한 전달교육과 전체 동명가족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여자 직원 및 여자 기술직원의 리더 양성을 위한 부녀자 지도반 위탁교육도 강화해 나갔다. 특히 새마을 운동의 기본이념과 필요성을 인식시키기 위한 정신교육을 실시하고 교육의 보다 높은 효과를 위하여 수원새마을 연수원 김준(金準)원장을 초빙하여 강의를 하였고 건전 가요보급을 위하여 진석환 씨등 많은 외부강사를 초빙하였다.
이로써 스스로 정리, 정돈, 정확, 정직, 정행하는 5정운동의 슬로건과 3보 이상 구보라는 구호를 생각하면서 동명은 공장 새마을운동의 선구자적 활동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