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을 지킨 향토기업인
동명목재상사가 합판 수출 기업으로서 세 번이나 수출 제1위를 획득하여 한국 수출의 기수가 되었다는 것은 동명이 수출입국을 향한 국민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는 점과, 특히 부산의 지역사회 발전을 위하여 적극 참여해 온 향토 기업임을 뜻한다. 말하자면, 동명목재는 이 지역의 발전을 위해 상공업계는 물론 사회개발에도 크게 공헌해 왔다는 점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강석진 회장의 기업경영 철학은, 기업의 이윤은 재투자되어야 하고 남은 것이 있으면 국가나 지역사회에 환원되어야 한다는 이념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먼저 품질 좋은 상품을 만들어 소비자에게 봉사하고 원가와 소요비용 만큼의 가치로 일반수요자에게 판매하고 이윤이 생기면 사원과 지역사회에 환원한다는 기업정신이 그것이다.
이에 따라 그는 60여년 동안 향토 기업인으로서 방위 및 원호사업을 위해 헌신 노력하였고, 지역사회에 불우청소년, 팔각회 등에 많은 성금과 지원금을 아끼지 않았다. 기업은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근로자와의 공동이익을, 그리고 기업가와 근로자가 합심하여 생산향상과 복지를 증진시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이행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이를 몸소 실천하였다.

부산은 한국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는 한국 제2의 도시이자 제1의 항만을 끼고 있는 우리나라 동남경제권의 중핵도시이다. 이와 같이 지정학적 조건뿐만 아니라 인적자원이 풍부하고 사회간접자본이 비교적 잘 구비되어 있는 부산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금융자금의 산실을 맡을 향토은행의 존재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에 따라 그는 부산상공업계가 당면하고 있는 자금사정의 애로를 타개할 방편을 연구해야 한다고 했다. 기업의 건전한 운영과 발전을 위해선 원활한 자금 유통이 바탕이 된다는 점은 자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기업의 설립 단계에서 뿐만 아니라 계속적인 기업활동에 있어 자금확보를 위한 자본조달은 기업을 움직이는 동맥 역할을 담당하며 기업의 자금조달이 재무계획상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이를 위해 지방은행의 설립은 경제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의 부산은행 설립은 이러한 당위성에서 출발하였다. 또한 부산지방 상공업계의 음성적인 사채자금을 유도하고 단기금융자금의 유통을 원활하게 할 단자회사인 부산투자금융 주식회사의 설립 또한 동일한 취지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부산지역발전을 위해 강석진 회장은 60여년 동안 동명그룹회사와 자택을 한번도 서울 및 다른 지역으로 옮기지 않았다. 평소 경영철학이 정치와 결탁해서 하는 사업을 싫어하였고 내 기술과 철학대로 부산을 위해서 일하겠다는 신념뿐이었다.

동명산업에서 바둑이표 페인트를 생산했을 때, 서울 뉴서울 빌딩에 서울사무소를 설치하고 그곳에 판매부를 두고 동명산업의 본사를 서울에 두자고 동명그룹의 참모들이 건의하자, 작은 계열기업이라도 서울에 올라가면 동명목재가 서울에 올라가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부산지역발전을 위해서 본사 이전을 허용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부산에 자리잡고 자수 성가한 그는 부산 땅은 나의 고향이라면서 그는 유난히 부산을 사랑했다. 사업터전을 고집스럽게 지켰고 부산을 떠나기 싫어했으며 회사발전과 경제성장의 붐을 타고 사업에서 얻은 이익을 부산발전에 환원하려 하였다. 서울로 가면, 회사도 잘되고 돈도 번다고 너도나도 떠들어댔지만 그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서울에 세워진 큰 빌딩들을 보고 부산 구 동명목재상사 자리에 대형 백화점을 세워 유통산업의 근대화를 계획한 적도 있었다. 서울에 있는 모 공과대학을 주위에서 인수하라고 하였으나 결코 서울에서는 학교를 건립하지 않았고, 부산에 세워야 한다 하면서 동원공고와 동원공업전문대학을 세웠다. 그는 우리나라 최고의 고액납세자이기도 하였다. 67년과 68년도 개인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고액납세자이기도 하였고 현주소를 부산에 두면서 세금을 많이 낸다는 것은 부산지역 발전을 위해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967년 397,976천원을 납세하였고, 이는 2위 납세자 납세액인 103,958천원보다 훨씬 많았다. 1968년의 납세액은 395,938천원이었고 2위는 135,739천원이었다. 납세란 국민된 의무의 이행이요, 주권자 입장에서 권리의 행사라고 생각하면서 납세의 소감을 밝히기도 하였다.
그는 부산지역인의 고용증대에도 항상 관심을 갖고 기업경영을 해왔다. 제조업체의 종업원수는 1962년 44,400명이 1966년 83,000명으로 증가하여 5년 동안에 2배 신장되었다. 업종별 종업원수의 비중은 섬유 화학이 70.3%를 차지한 것으로 보아 부산 제조업 구성이 노동집약적 경공업 중심임을 알 수 있다. 공업생산액도 이 기간 동안에 급신장하여 1966년은 1962년보다 무려 3배 이상 증가하여 당시 경제개발이 궤도에 오르면서 부산의 공업도 크게 성장은 했으나 한편으로 부가가치가 높은 업종이 발달한 반면에 대단위 노동집약적인 섬유, 신발, 합판 등의 업종 또한 수출과 관련하여 발달했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동명목재는 인원 10,000여명의 종업원을 채용함으로써 부산지역 근로자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시민가계 안정을 위해 크게 기여하였다.